상록수의 주인공처럼 지역사람들에게 농사와 목축업을 지도 해 주시며 목회를 하신 목사님.
퇴직후에도 말년까지 양돈업을 하시며 4개의 개척교회를 세우신 목사님.
한창 일하실 수 있는 60대에 은퇴를 하시며 후배목사를 키우신 목사님.
3남2녀중 두 자녀를 잃으시고 잃은 자녀를 생각하며 딸을 입양하여 키운 목사님.
마지막 가시는 길 자신의 시신까지 기증하신 목사님.
보여 주신 것 많고, 가르쳐주신 것이 많은 크신 목사님께서 가시는 길...
경기남노회의 장으로 환송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가 키우신 자녀들이 후배 목사님들이 제자들이 목사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모인자리 .
지금은 어느곳에서 이곳을 굽어보고 계실까요?
그분을 생각하며 환송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늘나라에서 면류관을 쓰고 계실 목사님을 생각하며.
크신분이다. 나도 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그 분에 삶에 사랑과 존경과 박수를 보내며...
양지교회 예쁜집사 민봉열드림
영원한 멘토, 최목사님!
신학교에 들어가 교사 자격증을 받았습니다. 교사가 좋은 일이고 혹시 필요 할지 몰라 공부를 했는데 그것이 양지교회에 오게 된 자격증이 되었습니다. 최목사님 부국섬유에 다니는 청년 성도들이 고등학교 과정을 이수하도록 학교를 세울 계획으로 교사자격증 있는 전도사를 구한 것입니다. 제가 최성일목사님 추천으로 양지교회에 오고자 목사님 뵈었을 때 오직 한 가지를 물으셨다. “술 담배 하는가?” 그러셔서 자신있게 대답하기를 “네 안합니다.” “그럼 바로 이사하도록 하게. 서울 간다고 밥 두 그릇 먹는 것 아니야. 여기 와서 열심히 하고 후계자가 되게” 그래서 면접한 날 바로 이사 올 날을 결정하여 80년 1월 양지교회에 오게 되었습니다. 술 담배를 하면 구원을 못 받는다 그런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좋은 제자로 지도자로 살 사람은 그런 정도는 능히 자제해야 한다는 가르침이셨던 것입니다. 이렇듯 사랑으로 성도들을 이끌어주신 최목사님은 스승이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교인들을 잘 지도하시고 가르치시되 아주 엄하고 세게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목사님 앞에서 감히 얼굴을 쳐다 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한없이 자상하시고 모든 것을 베풀어주시는 사랑의 사도이셨습니다. 교인들을 위해서 경목위원등 여러 가지 단체를 만들고 참여 지원하시었습니다. 지역을 발전시키기 위해 앞장 서 경제 활동의 시범을 보이시며 지역의 경제가 나아지도록 최선을 다하시는(양지신용협동조합의 창립, 주북리 축산단지 조성등) 하나님 나라를 복음으로 복지 사회를 이 땅에 이루고자 일생을 바치신 진정한 복음 실천자이셨습니다. 때로는 지도한 일이 잘못되어 경제적으로 타격을 받은 사람들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당하시기도 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가지고 변함없이 꾸준하게 사명감을 가지고 이 일을 행하신 실천가이셨습니다.
저는 처음 목회 생활을 시작한 지라 아무 것도 몰라 그리고 엄하시기에 제대로 얼굴을 뵈올 수 없었고 야단도 많이 맞았다고 회상됩니다. 긴장이 되어 제대로 쉬지도 못하며 항상 60계단이 넘는 교회를 뛰어 다니며 잘 할려고 노력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심히 부족함에도 칭찬해 주시고 세밀하게 가르쳐 주시면서 “먼저 사람이 되어야지, 그리고 목회자는 본이 되어야해.”라고 말씀하시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됩니다. 저와 같이 미천한 사람에게도 이러하셨으니 다른 분들에게는 말 할 것도 없습니다. 목사님을 통하여 많은 분들이 경제적인 자리를 잡았고, 선한 영향을 받고 도움을 받아 목회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이근태장로, 홍기성목사, 김주환목사, 박태식목사, 김성철목사, 이종덕목사, 심우갑목사등)
제가 안성제일교회에 부임하게 된 것도 박봉양목사님의 정치력을 높이 보시고 가서 배우도록, 그리고 우리 아이 선교가 잘 자라도록(85년 교우들의 사랑으로 심장수술 잘 받음) 그리고 처음부터 어려운 교회 가서 목회하면 평생 고생하게 된다고, 사랑으로 저를 큰 교회 큰 목사님 안성제일교회 박봉양목사님께 보낸 것입니다.
제가 81년 11월 교회를 사임하고 안성제일교회 부목사로 내정이 되었을 때입니다. 목사님께서 부르시더니 보광동교회 신목사님 부목사를 구하니 가서 설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저는 솔직히 자신도 없고 또 안성에 가기로 되어 있으니 못 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 말씀 하시기를 “그것은 내가 책임 질 것이니 이왕이면 서울에 가는 것이 좋다.”고 설교하게 하시었습니다. 결국 서울에 가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을 지내고보니 “더 좋은 것을 주시려는 목사님”의 그 큰 모습을 존경하는 마음이 더욱 커지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더 좋은 것을 모두에게 주기를 원하시는 어버이이셨습니다.
목사님을 모시고 훈련 받은 덕분에 안성교회에서의 생활은 바쁘고 힘이 들었어도 행복하게 생활 할 수가 있었습니다. 언제나 목사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그 기대를 이루는 목회자가 되어야 하겠다고 다짐하며 지내니 행복한 생활이었습니다.
이렇듯 목사님께서는 후배들을 잘 이끌어주시고 선한 영향력을 보여 주신 분이셨습니다.
또한 최목사님은 목사님들께는 복덕방 같은 참 좋은 능력있는 심부름꾼이셨습니다. 어려워하시는 분을 보시면 지나치지 않으셨고 가만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심방해주시고 격려해주시고 용기를 주셔서 친구분들께 존경을 받는 목사님중의 목사님이셨습니다.
화신교회(김주환목사)와 주북교회(조인철목사) 그리고 죽산 소명교회의 개척에는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되라.”는 주님 말씀을 실천한 위대한 복음 전파자이셨습니다.
안양에서 하나님 은혜로 아버님의 후원으로 방주안양교회(87년11월)를 개척하고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5-6년 지나니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개척교회를 하기에 능력있는 사람도 아니고 더욱 가족 목회를 하는 것에 대하여 한계성에 부딪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앞 길을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드리는 중 최목사님께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양지교회에 오지 않겠느냐”고, 그리하여 교우들의 뜻을 따라 부족한 사람이 큰 사랑을 입고 양지에 다시 오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옛 이야기가 되었지만 80년에 양지에 부임 할 때에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던 약속 “전도사만 아니라 후계자로 생각하니 열심히 일하라.”는 약속이 그대로 이뤄어지게 된 것입니다.
양지에 95년3월 다시 와서 목사님을 명예목사님으로 가까이 모시고 목회하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알아주시고 사랑해주시는 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물론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양지교회를 이끌어 나가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조금이라도 힘들어하거나 애써 일하면 목사님께서는 “할 일 많은 곳에 오게 해서 미안해요.”라고 끊임없이 격려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격려해 주실 때마다 오히려 저는 “아닙니다. 목사님 너무 감사하지요. 제가 부족해서 문제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하고 감사드리며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랑하는 양지교회가 그리고 부족한 사람이 조금이라도 주님의 일을 했다면, 그것은 전혀 저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고 어머님의 기도 덕분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저의 영원한 스승이 되시고 멘토가 되시는 최목사님의 사랑과 지도 덕분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한 짧은 인생을 늘 바쁘고 부지런하게 신실하게
목회자의 길을 걸으며 주님의 참 좋은 제자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신 분,
주님의 사랑으로 지역을 섬기며 믿음으로 복지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신 분,
동료 선후배 목회자들의 힘들고 어려운 현실을 아시고, 조금이라도 격려가 되고 도움을 주시기 위해
아낌없이 자신의 것을 내어주신 분,
목회자의 길을 힘써 실천하며 동료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어주신 분!
자녀들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끝까지 헌신적인 사랑으로 돌보아주신 분!
더욱 우리 양지교회에서는 잊을 수 없는, 교회를 교회되게 하고,
부흥과 발전의 든든한 기초를 놓으신, 존경 받을 수 밖에 없는 주님의 귀한 종 최목사님!
목사님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이제 행복하게 하늘나라에서 쉬시며 변함없이 기도해 주십시요!
오랜 시간동안 변함없이 지치도록 쓰러지시도록 오직 한마음으로
목사님을 간호하시어 큰 감동을 주신 존경하는 사모님과 온 가족께 주님의 축복을 간구드립니다.
그리고 목사님 사랑하시던 존경하는 원로목사님들께도 주님의 축복을 간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는 평안히 하늘나라에 거하십시요.
부족한 종 정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