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유럽영성투어 보고 ◈
1) 바울의 참수 터(8/23.수) -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인들을 방문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롬1:13) 그리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서바나(스페인)으로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소원했습니다.(롬15:22~23) 그러나 그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바울은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에 갔고 거기서 2년 동안 셋집을 얻고 자기에게 오는 사람들을 다 영접하며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행28:30~31) 바울이 자신의 때가 가까웠음을 깨닫고 디모데를 보기를 원했습니다. (딤후4:6, 9) 이상의 내용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참수를 당했다고 전해집니다.
바울이 참수 터를 갔을 때 그의 생전의 여러 가지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울의 회심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3차례의 전도여행을 하면서 선교에 전념했던 일, 그러나 무엇보다 기록을 남긴 일, 그리고 끝내 본인이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로마에서 참수당한 일, 이 모든 것은 바울이 하나님 나라 선교를 위한 마라톤과 같은 여정 이였고,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베드로 못지않게 크게 사용하셨다는 생각을 헸습니다.
2) 베드로 성당(8/21,월) - 우리는 쿠오바디스라는 책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베드로가 “쿠오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고 예수님께 질문하니 예수님께서 “나는 네가 버리고 온 로마로 간다.” 그래서 베드로는 다시 로마로 가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베드로의 무덤위에 베드로 성당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로마에 거주했다는 성경의 직접적인 증언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로마에 가지 않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1세기 말에는 베드로가 로마에 거주했었다는 전승이 있었고, 3세기 초, 중반에는 베드로가 25년간 로마에서 주교직을 수행하는 전승이 있지만 베드로의 로마행적을 설명 하는 데는 많은 난관이 있습니다.
면죄부와 르네상스의 시대적 배경 속에 세워진 베드로 성당의 규모와 예술성에 대해 입이 닫히지 않을 정도의 감탄이 있었습니다. 바티칸과 더불어 베드로 성당에 대해 면죄부라고 하는 부정적 이미지도 있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순 순수한 신앙적 열정으로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3)폼페이(Pompeii/ 8/23, 수) - 나폴리에서 남서쪽으로 23km 떨어진 베수비오 산 근처에 있는 폼페이는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격렬한 폭발에 의해 헤르쿨라네움 및 스타비아이와 함께 매몰되었습니다. 이 고대도시들의 유적들은 그리스·로마 시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독특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당시 도시전체의 모습으로 그대로 볼 수 있으며, 기도하며 화산폭발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인간화석은 저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4) 아씨시(8/23, 수) - 평화의 기도로 더 유명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이탈리아어: San Francesco d'Assisi, 1181년 또는 1182년 ~ 1226년 10월 3일)의 발자취를 둘러 보며 12세기 그 분의 영성의 발자취를 체험했습니다.
저명한 설교가이고. 또한, 프란치스코회의 창설자이기도 하며, 프란치스코는 생전에 사제 서품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역사적으로 유명한 종교인이며 성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5) 피렌체의 우피치 박물관(8/24, 목) - 미술 책과 신문 t.v에서 보던 명화를 직접 보면서 르네상스 시대를 이해 하게 되었습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르네상스 시대 미술의 의미와 그 흐름을 그리고 그것들이 신앙ㅇ과 어떤 연관이 있는 지를 볼 수 있는 시각이 생겼습니다.
6)밀라노(8/24, 목) - 밀라노의 중심가는 두오모 광장으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쇼핑 거리로 일컬어지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두오모는 14세기(1386)에 지어졌습다. 현재 이 광장은 밀라노의 중심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브라만테와 같은 예술가들이 이 광장을 중심으로 그들의 예술적인 감성을 키워 나갔습니다.
그러나 기독교회사에서 이 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로마에 크리스트교가 공인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대 지중해 세계는 여러 신을 섬기는 다신교적 전통이 강하였는데, 1세기 중엽 유일신 신앙인 크리스트교가 전파되어 다신교와 갈등을 빚었다. 수도를 비잔티움(콘스탄티노폴리스)으로 천도하고 개혁을 실시했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크리스트교를 공인하였습니다.
7)프라하(8/31 ~9/1 수~목) - 루터보다 100년,200년 앞선 종교개혁자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체코의 얀 후스와 영국의 존 위클리프입니다.
프라하의 종교개혁광장에는 얀 후스의 서거 500주년을 맞이하여 1915년에 얀 후스의 동상을 세웠는데 거기에는 “서로를 사랑하라. 모든 이들 앞에서 진실(혹은 정의)을 부정하지 마라”라는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얀 후스(Jan Hus, 1372년? ~ 1415년 7월 6일)는 체코의 기독교 신학자이며 종교개혁가입니다. 그는 존 위클리프의 영향으로 성서를 믿음의 유일한 권위로 강조하는 복음주의적 성향을 보였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 지도자들의 부패를 비판하다가 1411년 대립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파문당했습니다.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1415년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그에게는 거위(체코어로 goos와 발음이 비슷해서)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그는 죽으면서 나는 비록 화형을 당하지만 백년 후에는 백조가 나타나서 종교개혁을 성공시킬 것이라고 예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102년 후인 1517년에 루터가 종교개혁을 성공시키므로 그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의 종교개혁은 루터를 비롯한 쯔빙글리, 칼빈등 후대의 수많은 종교 개혁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프라하하면 떠오르는 중의 하나가 “프라하의 봄”입니다. 프라하의 봄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비에트 연방이 간섭하던 체코에서 일어난 민주화기를 말합니다. 이 시기는 1968년 1월 5일에 슬로바키아의 개혁파 알렉산데르 둡체크가 집권하면서 시작되었으며, 8월 21일 소비에트 연방과 바르샤바 조약 회원국의 동맹국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여 개혁을 중단시키면서 막을 내립니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일어났던 두 사건, 600년 전 얀 후스의 종교개혁, 50년 전의 프라하의 봄 모두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얀 후스의 꿈은 100년 후 루터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프라하의 봄은 1989년 동유럽의 민주화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실패한 것 같았지만 성공한 두 사건은 종교개혁과 동구의 민주화에 작은 씨앗이었고 그 씨앗은 위대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8)루터의 길을 가다(8/27 ~31 주일~목, 독일) - 금년도는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입니다. 이번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순례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곳입니다. 이 곳에서 루터의 발자취를 밟으면서 종교개혁의 영성을 배우고 체험하는 귀한 은혜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발자취는 대부분 구 동독지역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번 순례를 위해 독일을 통일 시키셨고, 순례의 편의를 위해서 유럽연합을 만드시고, 유로화를 함께 쓰게 하셨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9일(화)에는 루터가 사제서품을 받은 어거스틴 루터 설교교회, 후에 루터가 은신하며 신약성경을 번역했던 바르트부르커 성을 순례하였습니다.
30일(수)에는 루터의 종교개혁의 시발지인 비텐베르크로 이동하여 루터의 집과 그의 동료이자 제자인 멜란히톤의 집, 비텐베르크 교회 안의 루터와 멜란히톤의 묘와 동상 등을 보았습니다.
28일(월)에는 루터가 종교재판을 받았던 보름스로 이동하여, 재판을 박던 곳과 근처의 루터 광장(루터 프라자)로 이동하여 1868년도에 세운 루터 동상을 주변으로 그에게 종교개혁에 영향을 주고(1-4) 그를 도왔던(5-8) 네 모서리와 상하좌우에 있는 8명의 동상을 함께 보았습니다.
1. 존 위클리프 (John Wycliffe) 영국 (1320~1384)
2. 얀 후스 (Jan Hus) 체코 (1372~1415)
3. 페트뤼스 발데스 (Petrus Valdes) 프랑스 (1140~1218)
4.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Girolamo Savonarola) 이탈리아 (1452~1498)
5. ‘지혜공’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der Weise, ( 1463~1525)
6. 요하네스 로이힐린(Johann Reuchlin, 1455-1522)
7. 필리프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
8. 헤센의 필립 1세(Philip I of Hessen, 1504~1567)
9) 취리히에서 쯔빙글리를 만나다. (8/27, 주일) -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태어났고 쯔빙글리는 그보다 50일 후인 1483년 11월 1일 태어났습니다. 우리식으로 따지면 루터가 1살 많지만 만으로 따지면 50일 밖에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루터와 거의 같은 시대에 종교개혁운동을 했지만은 쯔빙글리는 루터보다 훨씬 철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대의 여러 종교개혁가들 보다도 급진적 이였습니다.
취리히(독일어 사용지역)에는 1519년 쯔빙글리가 목사로 사역하면서 개혁을 주도했던 그로스뮌스터 교회가 있습니다. 이 곳을 순례하면서 어쩌면 쯔빙글리가 지금 우리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정서와 가장 맞는 종교개혁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쯔빙글리는 마르틴 루터와 같이 성서를 최고의 권위로 받아들이면서도, 그보다 더 엄격하고 포괄적으로 모든 교리와 의식에 성서를 적용시켰습니다. 루터와는 성례전에서 의견 차를 보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빵과 포도주 안에 실제로 현림한다고 주장한 루터와 달리, 츠빙글리는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상징으로 해석했습니다.
1523년 도전적인 67개항을 공표했고, 이로써 전례에 대한 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1531년 10월 11일 카펠의 2번째 전쟁에서 츠빙글리는 취리히 군대에 종군목사로 동행, 그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개혁의 방법에서는 루터와 많이 부딪쳤고, 어떤 면에서는 루터와 경쟁관계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죽하면 쯔빙글리가 전사하자 루터는 “잘 죽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쯔빙글리가 개혁을 시작했을 때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고 그를 따랐습니다. 그의 개혁은 철저하고 완전한 개혁을 실천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교인들의 생계와 관련된 “그리스인으로 돈을 받고 용병으로 가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스도인이 주막을 경영하는 것 도 죄가 된다.” 등의 설교는 교인들이 부담을 느끼고 그를 떠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쯔빙글리는 스위스에서 칼빈이 종교개혁을 감행하기 전에 먼저 종교개혁의 불씨를 일으키고 그 기초를 닦은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만약 쯔빙글리가 종교개혁을 완성했다면 칼빈의 개혁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10) 기독교의 바티칸 제네바를 가다. (8/25, 금) -. 스위스 제네바에는 세계교회 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와 세계개혁교회커뮤니언(World Communion of Reformed Churches, WCRC)의 본부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네바는 기독교의 바티칸이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이 제네바가 우리 장로교인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장로교의 시조인 칼빈이 이 곳에서 목회를 하면서 장로교의 기틀을 마련했기 때문입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활동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조국 프랑스와 가까운 거리에 있고 또한 이 도시가 불어 사용권이여서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네바 대학의 바스티유 공원 안에는 칼빈과 그의 친구들인 파렐, 베제, 녹스의 거대한 종교개혁 기념비가 있습니다.
* 기념비 순서대로
파렐(Farel 1489 ~ 1565), - 스위스에 종교개혁을 도입
칼빈(깔뱅, Calvin 1509 ~ 1564),
베자(베제, Beze 1519 ~ 1605), - 칼빈의 후계자 역활
녹스(Knox 1513? ~ 1572) - 장로교의 제도적 틀을 세움
이 중에서 녹스만 스코틀랜드(영국) 출신이고 나머지 3명은 프랑스 출신입니다. 이들은 제네바에서 칼빈의 종교개혁을 도왔고, 칼빈 사후에는 칼빈의 신앙과 사상을 계승 발전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걸어서 갈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칼빈의 집, 칼빈의 거리, 칼빈이 목회했던 생 피에르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이 곳을 순례하면서 칼빈이 교회 뿐만이 아니라 제네바를 성시화 하려 했던 그의 꿈과 열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해서 루터의 발자취를 밟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러나 장로교 목사로서 장로교의 근원이 되는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칼빈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저에게 너무나 큰 의미와 은혜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11) 독일 통일의 물꼬를 튼 성 니콜라이 교회를 가다. (8/29, 화) -. 성 니콜라이 교회는 1165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16세기 초에 고딕양식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 니콜라이 교회는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 음악의 아버지 바흐,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슈바이처 박사와도 인연이 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성 니콜라이 교회가 독일 통일의 불씨가 되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끕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평화혁명이 이곳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는 1982년부터 매주 월요일 오후 6시마다 ‘평화의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1989년 9월 4일 평화기도회가 끝났어도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반대로 교회 앞 광장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시민들도 이에 합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2개월은 동독의 운명을 결정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다음 월요일이었던 9월 11일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월요데모(Montagsdemonstration)’가 되었습니다. 슈타지(동독 국가 보안부)는 체포와 강제진압으로 대응했습니다. 하지만, 9월 25일 평화기도회가 끝난 월요데모에는 무려 8천명이 합류하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저항운동은 더 거세져 갔습니다. 10월 2일 월요데모에는 2만 명이라는 숫자가 참가했다. 슈타지와 시위대 사이에 유혈사태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장벽 붕괴 한 달 전 1989년 10월 9일. 촛불 기도회 후 월요데모에는 무려 7만 명이 참가했습니다. 그들은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와 손에 손을 잡고 거대한 원을 그렸습니다. 그러면서 ‘비폭력(keine Gewalt)’을 외쳤습니다.
다시 10월 16일 월요데모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라이프치히에는 12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운집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왔던 것은 경찰이나 군인들도 이와 같은 평화시위를 위한 대열에 참가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상황을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한 승자도 패자도 없는 놀랍도록 평화로운 분위기’였다고 전한 바 있습니다. 실제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 중 단 한 명도 돌을 들지 않았고, 경찰도 단 한 발의 총도 쏘지 않았습니다.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3주가 지난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우리 일행은 이 곳에서 조국의 통일을 위해서 한국 교회가 큰 역할을 담당 할 수있게 해달라고 함께 기도했습니다.
12) 독일 통일의 현장을 가다. (8/30, 수) -.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은 무너지고 서독과 동독은 통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비슷한 처지에 있던 우리는 28년이 지난 지금도 전쟁, 그것도 핵전쟁의 긴장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너진 베를린을 중심으로 옛 서독지역과 동독지역을 오가면서 ‘내가 10년만 일찍 왔다면 한국의 통일은 10년 앞당겨졌을텐데...“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13) 떼제 공동체 (8/25 ~26 금 ~ 토, 프랑스) - 떼제 공동체(The Taizé Community)는 프랑스의 부르고뉴 지방 남부의 손 에 로와르(Saône-et-Loire)에 있는 떼제(Taizé)에 있습니다. 1940년 프랑스 개신교 수도자인 로제 수사에 의해 창설된 에큐메니칼 성격의 기독교 수도회입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주로 로마 가톨릭교회에 의해 소개되어 가톨릭에 의해 운영되는 수도원으로 잘못 아는 경우도 있으나, 창시자 로제 수사는 개신교인으로 가톨릭에 구애받지 않으므로, 어느 교단에도 소속되지 않은 초교파 단체입니다. 현재 공동체에는 25개국 출신의 남성 수도자들이 모여 기도와 묵상을 중심으로 공동생활을 하고 있고, 신한열 이라는 한국인 수사도 있습니다.
이 곳에는 매주 전 세계에서 6,000명의 청년들이 모여 하루 세 차례 공동의 기도를 드립니다, 이곳에서 함께 기도회에 참석하고, 식사와 친교를 나누면서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신기한 체험을 했습니다.
1. 설교가 없어도 - (성경봉독과 묵상만 있음)
2, 뜨거운 찬양이 없어도 - (조용한 떼제 찬양만 있음)
3. 통t성기도가 없어도 - (묵상기도만 있음)
4. 영상(화면)이 없어도 - (떼제 찬양곡 숫자만 표시됨)
이렇게 깊은 영성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을
* 8월 20일부터 9월 2일까지 13박 14일의 꽉 찬 종교개혁 500주년 유럽영성투어를 다녀올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경기남노회 노회장님과 교육부 그리고 양성교회 모든 교우님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 이번 영성투어는 분당한신교회에서 주관하시고 분당한신교회 이윤재 목사님께서 심혈을 기울려 준비하시고 진행 해 주셨습니다. 이번 일정에는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등 43명이 함께 참여하셨습니다.
* 순례일정보다는 역사적 순서를 따라 일정을 바꿔서 정리했습니다.
* 9월 10일 부터 10월 29일까지 8주간 양성교회 주보 목회칼럼에 실었던 글들입니다.
주보의 목회칼럼 란에 목회칼럼 버전으로 작성했습니다. 다음에 소 책자용으로 작성 할 때에는
보다 업그레이드하고 사진 및 기타 자료 등을 첨부해서 보다 좋은 자료집이 되도록 하겠습니다.